자연의 이상을 좇는 여정
― 글. 이윤정 (서정아트 큐레이터)
“이춘환의 <빛+결>은 대상을 그린다기보다
‘떠오르게 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작품이다.”
유리창을 통해 갤러리 관내 전시된 다양각색(多樣各色)의 캔버스가 보인다. 마치 물결에 햇살이 비치듯 불규칙적이게 일렁이는 물감은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강가의 모습과 닮았다. 여러 색이 한자리에 모여 생성하는 미묘한 리듬감과 선명하고 또렷한 터치가 빚어내는 이미지의 조화는 매력적이다. 그렇기에 이춘환의 <빛+결>은 대상을 그린다기보다 ‘떠오르게 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작품이다.
이춘환 화백의 대표 시리즈 <빛+결>은 1989년 수묵화 기법으로 처음 공개되어 2002년 조흥 갤러리(현 신한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청해기행’을 통해 관람자들 앞에 나타났다. 무채색 물감을 여러겹 쌓아 단단한 층을 형성한 후 그 위에 얇은 채색을 얹어 만들어진 빛결은 가까이서 볼 때와 멀리서 볼 때의 시각적 차이를 발생시킨다. 작품과의 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효과를 감지한 관람자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관찰한다. 눈앞에 두고는 파악할 수 없는 작품의 전체적인 형상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한 방향으로 그어진 획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옅어지며 색채는 마치 중력의 힘을 거스르듯 위에서 아래로 무겁게 떨어지는 동시에 가볍게 흩어진다.
이 화백은 2019년부터 <빛+결>연작을 선보였는데, 초창기 <빛+결(수묵)>(1989)과 현재의 <빛+결>(2021)을 비교해 보면 단순히 작업 방식에만 변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재료와 물성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에도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전 빛결 시리즈의 주축이 되었던 강렬한 색상 대비나 색채 간의 충돌로 인한 역동성을 지금의 신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그 자리는 그라데이션으로 점철된 화면으로 채워져 대지의 끝과 하늘이 맞닿아 이루는 경계를 연상하게 한다.
특정한 모티프 없이 오로지 점과 색으로만 이뤄진 추상화는 1970년대부터 한국 화단의 지배적인 미술 운동으로서 한국 미술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장르가 되었다. 캔버스에서 구체적인 형상이 사라지는 경향은 단색조 회화로 나타났다가 또다시 색채와 결합하여 역동성을 보이며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 화백이 이러한 미술계의 흐름을 의식하며, 시류에 따라 추상화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이 화백의 작품이 구상에서 추상화로 이행하는 과정 또는 그 안에서 발생한 작은 변화의 길목에는 언제나 그의 작업의 원천이었던 완도의 섬마을이 있다. 전라남도 완도에서 태어난 이 화백은 수묵화와 수묵담채 등 다양한 기법으로 자신의 고향 풍경을 담아냈다. 다른 장소를 묘사한 것처럼 보이는 초기 작품들도 기후와 시간대에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완도의 청정한 풍경을 중심 소재로 했음에는 변함이 없다. 특별한 기교 없이 묵묵히 완도의 산하를 묘사하는 그의 작업 방식은 ‘덤덤하게 표현할수록 깊이가 잘 드러난다’고 믿는 이 화백의 작업관을 담아낸다. 특히 세차게 부는 바람, 비가 온 후 가라앉은 안개, 대기의 흐름과 같은 생생한 묘사가 뛰어난 <우중의 단양 Danyang, Mid-rain>(2005), <자연의 숨결 The Breath of Nature>(2007), <자연의 소리 The Sound of Nature>(2005)를 보면 구체적인 자연의 형상을 담아내면서도 어느 하나 과장하고 왜곡하는 면이 없다. 높은 시점에서 산을 조망한 <속리산의 기운 The Mood of Songnissan>(2005), <범봉운해 The Sea of Clouds at Bumbong>(2005), <울산바위의 설후 Ulsanbawi Rock After Snowfall>(2005) 역시 직접 다녀와서 보고 느낀 산에 대한 인상을 충실하게 담아내는 동시에 산을 둘러싼 날씨와 공기의 흐름을 표현하는 것 또한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동양 철학을 기반으로 자연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포착되는 것이다. 여기서 ‘먹’이라는 재료의 선택은 탁월해 보인다. 시간을 들여 우려낼수록 한없이 짙은 농도를 띠는 먹은 종이에 닿는 순간 단순히 ‘검다’고 정의내릴 수 없을 만큼 맑아진다. 먹으로 인한 몽글몽글한 터치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마저 불러일으켜, 어스름한 물안개의 모습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외형의 또렷한 윤곽이 부재한 풍경을 이에 어울리는 재료로 담아내기 시작하면서 많은 연작이 탄생하지만, 이 화백은 여느 다수의 예술가가 그러하듯 ‘새로운 재료’를 탐색하고 싶은 갈망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했을 것이다. 재료를 향한 이 화백의 실험 정신은 2005년을 기점으로 변화된 화풍에서 크게 감지된다.
중첩 행위와 시간의 흔적
산의 형상 외에도 그것을 둘러싼 에너지도 함께 담아내려는 이 화백의 굳건한 동양적 작업관이 수묵화 시리즈를 탄생하게 한 중요한 동인이었다면,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산의 이면을 포착하기 위한 서양화 재료의 적용은 단순 명료한 동양 철학의 완성을 촉진시킨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춘환의 시리즈에서 포착되는 ‘한국적 소재’, ‘한국적 색’, ‘한국의 재료’만 보아도 이 화백이 얼마나 한국적인 것에 심취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산의 기운’을 그렸던 중반기부터 갑자기 서양화 재료를 적용한 것은 무엇을 위한 행보로, 어떤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까.
새벽녘 산을 오르며 느꼈던 맑은 공기의 느낌이 수묵화 시리즈에서 충분히 보여졌다면, ‘산의기운’ 시리즈에서는 먹으로 빚은 운율이 거둬지고 평면적이고 단순화된 형태가 가득했다. 리듬감을 형성하는 각기 다른 산의 높이 안에서 배경을 메우는 수직과 수평의 일정한 격자는 전체적인 균형감과 질서를 잡는다. 이 화백은 “단순함을 표현하고자 여러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강조한 바 있다. 더 많은 색을 쓸수록 화면은 풍부해지는 법인데, 오히려 평면성과 단순함을 이야기하는 점은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점을 찍어내는 ‘중첩 행위’를 관찰하고 있자면, 어떤 형태를 추구하든 시간의 흔적과 깊이를 표현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보인다. 완성하기까지 행위의 과정을 기록으로 보여주듯 겹겹이 쌓은 레이어는 단숨에 생기는 것이 아닌, 긴 시간 들인 호흡과 반복적 행위가 만들어낸 결과인 것이다. 그렇게 반복된 터치에 의해서 각 연작들이 환기시키는 ‘익숙함’은 이 화백 고유의 특성을 찾아내는 데에 도움을 준다.
현재 이 화백은 돌가루를 갈아 아크릴 물감에 섞어 질감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한다. 레이어를 쌓는 밑작업에서 돌가루는 입체감을 부여할 수 있는 동시에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서 어떤 매체와도 혼합 가능한 유연성을 지닌다. 적절한 비율로 갖가지 재료를 혼합하여 캔버스의 밑층을 단단하게 만드는 공정을 거치면, 정교한 묘사와 감각적인 터치가 훨씬 수월해진다. 현대적 기법을 창안하며 늘 새로운 방식을 적용하는 데에 여념이 없지만, 모든 작업의 기반은 자연을 바라보는 동양 철학의 관점에서 시작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화백에게 재료는 부차적인 도구였을 뿐. 화면 안에 묘사된 완도 앞바다의 양양한 물결은 이상향에 가까운 자연의 모습을 끝까지 좇는 굳은 심지를 대변한다. 피안의 행복을 약속하는 듯한 그의 작품 속 자연, 즉 고향은 30년이 넘어가는 긴 작업의 여정을 버티게 한 주춧돌인 셈이다.
자연의 이상을 좇는 여정
― 글. 이윤정 (서정아트 큐레이터)
“이춘환의 <빛+결>은 대상을 그린다기보다
‘떠오르게 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작품이다.”
유리창을 통해 갤러리 관내 전시된 다양각색(多樣各色)의 캔버스가 보인다. 마치 물결에 햇살이 비치듯 불규칙적이게 일렁이는 물감은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강가의 모습과 닮았다. 여러 색이 한자리에 모여 생성하는 미묘한 리듬감과 선명하고 또렷한 터치가 빚어내는 이미지의 조화는 매력적이다. 그렇기에 이춘환의 <빛+결>은 대상을 그린다기보다 ‘떠오르게 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작품이다.
이춘환 화백의 대표 시리즈 <빛+결>은 1989년 수묵화 기법으로 처음 공개되어 2002년 조흥 갤러리(현 신한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청해기행’을 통해 관람자들 앞에 나타났다. 무채색 물감을 여러겹 쌓아 단단한 층을 형성한 후 그 위에 얇은 채색을 얹어 만들어진 빛결은 가까이서 볼 때와 멀리서 볼 때의 시각적 차이를 발생시킨다. 작품과의 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효과를 감지한 관람자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관찰한다. 눈앞에 두고는 파악할 수 없는 작품의 전체적인 형상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한 방향으로 그어진 획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옅어지며 색채는 마치 중력의 힘을 거스르듯 위에서 아래로 무겁게 떨어지는 동시에 가볍게 흩어진다.
이 화백은 2019년부터 <빛+결>연작을 선보였는데, 초창기 <빛+결(수묵)>(1989)과 현재의 <빛+결>(2021)을 비교해 보면 단순히 작업 방식에만 변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재료와 물성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에도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전 빛결 시리즈의 주축이 되었던 강렬한 색상 대비나 색채 간의 충돌로 인한 역동성을 지금의 신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그 자리는 그라데이션으로 점철된 화면으로 채워져 대지의 끝과 하늘이 맞닿아 이루는 경계를 연상하게 한다.
특정한 모티프 없이 오로지 점과 색으로만 이뤄진 추상화는 1970년대부터 한국 화단의 지배적인 미술 운동으로서 한국 미술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장르가 되었다. 캔버스에서 구체적인 형상이 사라지는 경향은 단색조 회화로 나타났다가 또다시 색채와 결합하여 역동성을 보이며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 화백이 이러한 미술계의 흐름을 의식하며, 시류에 따라 추상화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이 화백의 작품이 구상에서 추상화로 이행하는 과정 또는 그 안에서 발생한 작은 변화의 길목에는 언제나 그의 작업의 원천이었던 완도의 섬마을이 있다. 전라남도 완도에서 태어난 이 화백은 수묵화와 수묵담채 등 다양한 기법으로 자신의 고향 풍경을 담아냈다. 다른 장소를 묘사한 것처럼 보이는 초기 작품들도 기후와 시간대에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완도의 청정한 풍경을 중심 소재로 했음에는 변함이 없다. 특별한 기교 없이 묵묵히 완도의 산하를 묘사하는 그의 작업 방식은 ‘덤덤하게 표현할수록 깊이가 잘 드러난다’고 믿는 이 화백의 작업관을 담아낸다. 특히 세차게 부는 바람, 비가 온 후 가라앉은 안개, 대기의 흐름과 같은 생생한 묘사가 뛰어난 <우중의 단양 Danyang, Mid-rain>(2005), <자연의 숨결 The Breath of Nature>(2007), <자연의 소리 The Sound of Nature>(2005)를 보면 구체적인 자연의 형상을 담아내면서도 어느 하나 과장하고 왜곡하는 면이 없다. 높은 시점에서 산을 조망한 <속리산의 기운 The Mood of Songnissan>(2005), <범봉운해 The Sea of Clouds at Bumbong>(2005), <울산바위의 설후 Ulsanbawi Rock After Snowfall>(2005) 역시 직접 다녀와서 보고 느낀 산에 대한 인상을 충실하게 담아내는 동시에 산을 둘러싼 날씨와 공기의 흐름을 표현하는 것 또한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동양 철학을 기반으로 자연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포착되는 것이다. 여기서 ‘먹’이라는 재료의 선택은 탁월해 보인다. 시간을 들여 우려낼수록 한없이 짙은 농도를 띠는 먹은 종이에 닿는 순간 단순히 ‘검다’고 정의내릴 수 없을 만큼 맑아진다. 먹으로 인한 몽글몽글한 터치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마저 불러일으켜, 어스름한 물안개의 모습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외형의 또렷한 윤곽이 부재한 풍경을 이에 어울리는 재료로 담아내기 시작하면서 많은 연작이 탄생하지만, 이 화백은 여느 다수의 예술가가 그러하듯 ‘새로운 재료’를 탐색하고 싶은 갈망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했을 것이다. 재료를 향한 이 화백의 실험 정신은 2005년을 기점으로 변화된 화풍에서 크게 감지된다.
중첩 행위와 시간의 흔적
산의 형상 외에도 그것을 둘러싼 에너지도 함께 담아내려는 이 화백의 굳건한 동양적 작업관이 수묵화 시리즈를 탄생하게 한 중요한 동인이었다면,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산의 이면을 포착하기 위한 서양화 재료의 적용은 단순 명료한 동양 철학의 완성을 촉진시킨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춘환의 시리즈에서 포착되는 ‘한국적 소재’, ‘한국적 색’, ‘한국의 재료’만 보아도 이 화백이 얼마나 한국적인 것에 심취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산의 기운’을 그렸던 중반기부터 갑자기 서양화 재료를 적용한 것은 무엇을 위한 행보로, 어떤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까.
새벽녘 산을 오르며 느꼈던 맑은 공기의 느낌이 수묵화 시리즈에서 충분히 보여졌다면, ‘산의기운’ 시리즈에서는 먹으로 빚은 운율이 거둬지고 평면적이고 단순화된 형태가 가득했다. 리듬감을 형성하는 각기 다른 산의 높이 안에서 배경을 메우는 수직과 수평의 일정한 격자는 전체적인 균형감과 질서를 잡는다. 이 화백은 “단순함을 표현하고자 여러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강조한 바 있다. 더 많은 색을 쓸수록 화면은 풍부해지는 법인데, 오히려 평면성과 단순함을 이야기하는 점은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점을 찍어내는 ‘중첩 행위’를 관찰하고 있자면, 어떤 형태를 추구하든 시간의 흔적과 깊이를 표현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보인다. 완성하기까지 행위의 과정을 기록으로 보여주듯 겹겹이 쌓은 레이어는 단숨에 생기는 것이 아닌, 긴 시간 들인 호흡과 반복적 행위가 만들어낸 결과인 것이다. 그렇게 반복된 터치에 의해서 각 연작들이 환기시키는 ‘익숙함’은 이 화백 고유의 특성을 찾아내는 데에 도움을 준다.
현재 이 화백은 돌가루를 갈아 아크릴 물감에 섞어 질감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한다. 레이어를 쌓는 밑작업에서 돌가루는 입체감을 부여할 수 있는 동시에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서 어떤 매체와도 혼합 가능한 유연성을 지닌다. 적절한 비율로 갖가지 재료를 혼합하여 캔버스의 밑층을 단단하게 만드는 공정을 거치면, 정교한 묘사와 감각적인 터치가 훨씬 수월해진다. 현대적 기법을 창안하며 늘 새로운 방식을 적용하는 데에 여념이 없지만, 모든 작업의 기반은 자연을 바라보는 동양 철학의 관점에서 시작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화백에게 재료는 부차적인 도구였을 뿐. 화면 안에 묘사된 완도 앞바다의 양양한 물결은 이상향에 가까운 자연의 모습을 끝까지 좇는 굳은 심지를 대변한다. 피안의 행복을 약속하는 듯한 그의 작품 속 자연, 즉 고향은 30년이 넘어가는 긴 작업의 여정을 버티게 한 주춧돌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