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달항아리, 그 텅 빈 충만

2021-03-15

순백의 달항아리, 그 텅 빈 충만 

― 글. 황정수 (미술평론가) 


한국 전통의 표상, 달항아리


한국의 전통을 상징하는 표상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은 한국미술사의 오랜 숙제이다.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반가사유상’을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 브랜드로 만들겠다고 했지만, 이미 한국미에 대한 논의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회화를 전공하는 이들은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실경산수나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풍속도를 한국미의 정수라고 말하고, 건축하는 이들은 한국의 사찰이나 양반가의 한옥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또한 의상 전문가들은 한복의 색이나 옷깃의 선을 한국미의 최고라 한다. 이런 의식은 각 분야에 걸쳐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국 문화의 상징으로 조선시대 백자가 대두되었다. 도자기 중에서 먼저 한국을 대표했던 것은 고려청자였다. 청자의 비취색 고운 빛은 한동안 한국을 상징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청자는 전통의 중심에 있기 어려운 귀족문화의 산물이라 평민 문화의 유산인 새하얀 백자가 청자를 대신하여 한국미의 상징이 되었다. 백자가 한국 문화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를 비롯한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의 영향이 매우 컸다.


이들은 한복의 흰색, 한국의 파란 하늘과 청화 백자의 빛깔을 대비시켜 한국의 대표적인 색깔로 흰색을 설명하였다. 사상적으로는 ‘비애의 미’ 등 애상적인 미감으로 설명하여 후대 한국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대해 전문적인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한국 미술 미학사의 전환점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이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 중의 대표적인 백자가 달항아리였다. 중국이나 일본의 도자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달 같이 둥그런 순백자 항아리는 그들을 매료시켰다.


근래에 미술사학자 유홍준에 의해 다시 한 번 인기몰이를 하게 된 달항아리는 국립중앙박물관, 삼성미술관 등 여러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며 새로운 열풍의 시작을 알린다. 많은 예술가들이 달항아리에 매료되어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전통 도자기를 만드는 도예가나 현대 도예를 하는 작가들 모두 달항아리 제작에 몰두하였고, 사진이나 회화를 하는 평면작가들도 달항아리를 소재로 작품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꾸준히 달항아리를 소재로 한 회화로 두각을 나타낸 작가가 서정(瑞丁) 이춘환(李春煥)이다. 그 또한 단순화한 달 항아리 도상과 매화 등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소재들을 결합하여 한국적인 정서를 드러내고자 노력하였다.



고향 완도의 풍경과 이춘환 화백

화가 이춘환의 고향은 전라남도 완도이다. 지금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육지와 다름없지만, 조선시대에는 죄인을 유배 보낼 만큼 아주 외딴 섬이었다. 특히 완도 부속 섬 같은 신지도는 많은 문사들이 중죄인으로 온 대표적인 유배지이다. 그런데 유배는 개인에게는 가혹한 시간이었지만, 때론 자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창작의 시간을 갖게 하는 유용한 시간이기도 하였다. 이곳으로 유배를 온 가장 유명한 인물은 조선후기 ‘동국진체’를 완성한 이광사(李匡師)이다. 이광사는 15년 동안 신지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한국적인 서체의 모태가 된 ‘동국진체’를 완성한다. 그가 동국진체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인근 명사십리 모래사장의 이름다운 고운 모래들, 푸른 바다, 거친 파도 등은 그의 예술적 촉수를 자극했다. 또한 중앙 정치 세계에서 내쳐진 지독한 외로움과 현실에 대한 그리움 등 혼재된 의식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갈구가 없으면 극복되지 못할 것들이었다. 더욱이 신지도는 많은 문사들이 유배되어 학문적, 예술적 흥취가 잠재되어 있는 곳이다. 이런 분위기와 이광사의 예술적 재능이 만나 새로운 창조적 세계를 이루었다 할 수 있다.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예술적 감흥을 느끼게 되는 것을 보통 ‘남도 기질’이라 하는데, 이광사에게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기질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남도 기질을 보인 또 한 명의 작가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이다. 김환기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서울에 정착하며 나아갈 미술세계에 대한 고민을 한다. 결국 그가 찾았던 것은 고향의 자연과 햇살이었다. 그는 어려서 생활한 신안군 안좌도의 자연을 떠올리며 예술세계를 구축해나갔다. 어려서부터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났던 김환기는 집 주변의 산과 달, 구름, 사슴, 매화 등 자연물을 서정적 언어로 묘사하려 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자 한국 정서의 표현이었다.


김환기가 고향의 자연과 함께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소재가 백자 항아리였다.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그는 평소 백자 항아리를 수집하기를 즐겨 하였다. 그의 성북동 집 수향산방(樹鄕山房)에는 백자가 많았다. 친구들이 찾아오면 김환기는 좋아하는 백자 항아리를 꺼내 술 한잔하며 감상하기를 즐겼다. 한 번은 친구들이 놀러와 술자리가 벌어졌다. 김환기는 적당한 크기의 둥그런 백자 항아리를 꺼내 마당에 있는 우물의 덮개 위에 올려놓고 감상하였다. 저녁이 되어 어둠이 내려앉자 김환기의 취기가 올라왔다. 김환기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좌중을 바라보며 “아아~ 달이 떴네. 달이 떠올라!” 하며 일어나 한 바탕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러한 김환기의 백자 애호는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캔버스에 큰 달항아리를 그리고 그 옆에 매화를 그리기도 하고, 서정주의 시를 적어놓기도 하였다. 그에게 있어 백자는 자신의 미학적 정서의 표현이자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소재였다. 이러한 김환기의 소재 취택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이춘환 화백의 경험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 섬에서 태어났고, 문학을 좋아했으며,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부단히 애를 썼다는 면에서 두 사람은 매우 비슷한 궤적을 보인다.



텅 빈 충만의 상징 달항아리를 찾다

화가 이춘환은 맛있는 김으로 유명한 완도의 읍내에서 태어났다. 읍내라 하지만 섬의 중심일 뿐이요 문화적인 혜택은 많이 받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한문을 익히고 서예를 익히다 보니 그림에도 관심이 생겼다. 그러나 완도에는 그림을 배울만한 화가가 없었다. 근처의 진도에는 소치(小癡) 허련(許鍊)에서 시작한 남도 문인화가 꽃을 피우고 있었지만, 완도는 그에 비하면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독학으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 날 때마다 완도의 자연을 보며 그림을 그렸다. 산과 들을 쏘다니고, 해변을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산수화에 전념하게 되었다. 다행히 재주가 있어 혼자 힘으로 공부했음에도 누구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점차 활동 영역을 넓힌 이춘환은 목포, 광주 지역의 화가들과 교류하기도 하며, 결국 서울에까지 진출하여 화가로서 자리를 잡는다. 이춘환은 서울에서 산수화를 그리며 그림에 열중하던 중 운명처럼 법정(法頂) 스님을 만나며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다. 스님의 ‘무소유(無所有)’ 사상에 감화를 받은 화백은 그림을 그리다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가끔 스님이 머물던 서울 성북동 길상사를 찾아 속내를 털어놓곤 하였다. 그날도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림 그리며 느낀 어려운 점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던 스님은 가만히 이춘환 화백을 쳐다보며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자네는 너무 욕심이 많아!”


깜짝 놀란 이춘환은 느닷없는 한 마디에 놀라 한편으론 억울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속내를 들킨 듯도 하여 자기도 모르게 얼른 대답하였다.


“스님! 저는 욕심이 없는데요. 그냥 그림 그리는 일에서만 하고 싶은 것이 조금 있을 뿐인데요.”


스님은 그 말을 듣고 씩하고 웃기만 하였다. 사실 이춘환이 스님의 말뜻을 모를 리도 없었고, 스님도 이춘환의 속마음을 모를 리도 없었다. 이 선문답 같은 몇 마디가 오가는 짧은 순간에 이춘환은 많은 것을 느낀다. 특히 그동안 그림을 그리며 새로운 변화를 꾀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진 자신의 처지를 구해낼 화두의 답을 얻는다. 바로 스님이 설파한 무소유의 정신을 축약한 ‘텅 빈 충만’이라는 말이었다. 이미 출판되어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떨친 책 이름이기도 한 이 말은 이후 자신의 미술 세계의 한 시대를 책임지게 된다.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가득 찼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 충만하다.”


과연 텅 비어 있는데도 꽉 차 있는 것처럼 충만한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텅 빈 충만’에 해당하는 소재를 찾아 헤맨다. 미술과 관련된 많은 책을 보아도 전국에 널려 있는 문화재를 찾아다녀도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또 다시 전국의 박물관을 찾아다니고, 학계의 지식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결국 해답을 얻는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소재가 조선 백자 대호, 곧 ‘달항아리’이다. 그의 눈에 보름날 밤하늘에 떠있는 둥근 달과 닮은 달항아리는 법정 스님이 말한 ‘텅 빈 충만’의 대표적인 사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이춘환은 달항아리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계속 실경산수와 채색 풍경화를 그려오던 그에게 갑자기 소재를 바꿔 달항아리를 그리자니 시작부터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달항아리라는 소재는 이미 많은 미술가들이 해오던 터였다. 아무리 해도 이전에 해왔던 작가들보다 더 잘하기도 쉽지 않았고, 또 그들보다 새로우면서도 창조적인 작품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경기도 광주나 여주 지역에 있는 도예 작가들의 작업실에 찾아다니며 백자를 연구하고 직접 백자를 만들어보기도 하였다. 점차 백자에 심취한 이춘환은 도요지 옆에 집을 얻어 2년여를 살면서 연구하였다.


한동안 백자를 제작하며 연구하다 보니 어느 정도 백자에 대해 알 것 같았다. 그때부터 이춘환은 새로운 형식의 달항아리, 보다 단순화된 달항아리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나의 화면에 어떻게 달항아리를 구성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였다. 먼저 고민한 것이 그림 내용의 차별화였다. 다른 화가들은 주로 달항아리를 주 대상으로 했으니 더 나아가 달항아리 주변에 다른 전통적인 소재를 대비시키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작한 작품이 달항아리와 반가사유상, 달항아리와 승무 등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를 담은 대상들을 대비시키는 구성이었다. 양쪽 두 개의 화면을 장식한 역사적 깊이를 담고 있 는 각각의 대상들은 서로 보완하면서 화면을 충만하게 만들어 나갔다.


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그림을 그릴 바탕 매체와 채색이었다. 한지를 여러 번 배접해 두껍게 만들어 그려보기도 하고, 외국산 종이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 그려 보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서양화 캔버스에 그려보기도 하며 가장 적합한 것을 고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채색은 기존 동양화 물감에 석채를 써보기도 하고 값비싼 금박을 써보기도 하였다. 또한 유화 물감이나 아크릴 물감도 자주 사용하여 보았다. 결국 캔버스에 아크릴이 자신의 그림에 적합하다는 것을 느끼고, 우선 이를 중심으로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다른 매체를 활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런 수고로운 과정 속에서 점차 내용을 풍성하게 만들면서 그의 새로운 그림 세계는 완성되어 갔다.


다행히 새로 시작한 그림에 대한 반응이 매우 좋았다. 전시회의 반응도 좋았고 미술시장에서 반응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이런 좋은 반응에 고무된 이춘환은 점차 달항아리 소재의 그림을 다양화한다. 전통적인 소재인 반가사유상이나 승무 등을 넣으니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일부 애호가들이나 젊은이들은 전통을 무속과 같은 샤머니즘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어 이를 계기로 더욱 다양화하였다. 그래서 새로 시도한 것이 오방색을 이용하여 점묘법으로 바탕을 칠하거나 색동 색깔 느낌 나도록 바탕을 메우고, 그 위에 달항아리와 어울리는 또 다른 한국적인 소재를 배치하는 것이었다.


목련 등 여러 소재를 달항아리와 배치해 보았으나, 역시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매화’였다. 매화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꽃 중의 하나이고,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워 선비들이 가장 좋아하는 정신적인 꽃이기도 하다. 달항아리 옆에 한 줄기 매화 가지를 곁들여 놓으니, 마치 달빛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매화 같았다. 둥그런 달항아리의 곡선과 줄기에서 뻗어 나온 직선의 가지는 음양의 자연스런 조화처럼 보였다. 그 또한 달항아리와 매화의 조합을 매우 좋아하였다. 작품을 하는 고된 과정 속에서도 스스로 달항아리와 매화에 매료되기도 하였다.


그는 종종 자신의 작품에 대해 애호가들의 마음을 느껴보기 위해 작은 그림을 자신의 잠자리 옆에 두고 보기를 즐겨한다. 자신의 그림과 대화를 나누며 스스로 그림에 지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번은 달항아리를 그린 작은 그림 하나를 새로 침대맡에 두고 잠이 들었는데, 그림 속 항아리에서 느끼는 허한 듯 풍요로운 느낌이 들어 전통적 정서를 담은 그림의 효용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감동을 가슴에 안고 더욱 달항아리 그림에 매진한 이춘환 화백은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며 새로운 매체를 활용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의 달항아리 그림은 세월이 지나갈수록 점점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스스로 그림이라는 것은 점점 대상의 구체적인 모습을 지워나가는 것이고, 대상을 단순화하는 것이 가장 자연에 가깝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언젠가 그의 그림은 백자의 형태마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있는 백자의 향기는 그림 속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만치 백자 달항아리는 그의 몸과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른 심상이라 할 만하다.



추사 김정희의 예술 집념을 배우다

이춘환은 미술 작업을 하며 가장 롤 모델로 삼는 인물이 조선후기 예술계를 휩쓸어 ‘완당바람’을 일으킨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이다. 추사는 조선 전래의 서화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 곧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세계를 이룩한 불세출의 슈퍼스타였다. 그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재능도 있었지만 추사가 가지고 있었던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중국에 당대의 석학이었던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의 학문 세계를 본받고자 하였고, 그들이 가지고 있거나 소개해준 중국 명품을 보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다지려 애썼다. 이후 유배지에서도 매일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각고의 노력 끝에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는 한편 많은 작품을 남긴다.


이춘환이 추사를 좋아했던 점은 붓 수천 자루를 달게 하였고, 벼루 열 개에 구멍을 뚫을 만큼 많은 글씨를 썼다는 점이다. 물론 거기에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춘환은 추사의 노력을 교훈 삼아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젊어서는 실경산수를 그리기 위해 산이나 바닷가를 열심히 다녔고, 종잇값을 당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더욱이 스승 밑에서 공부할 처지가 못 되어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공부였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노력밖에 없었다.


이춘환의 고향 완도 정도리에는 구계등(九階燈)이란 아름다운 곳이 있다. 구계등 해안에는 오랜 시간 파도에 마모되어 둥그렇게 된 몽돌이라는 돌이 가득 차 있다. 어느 날 구계등 해안가에서 쉬던 이춘환은 여기 저기널려 있는 둥그런 돌들을 보며 많은 것을 느낀다. 마침 하늘에 내려 쪼이는 햇살이 돌에 비추니 더욱 반짝이었다. 그는 몽돌이 둥그렇게 된 것은 수없이 많은 날을 파도에 휩쓸리며 고난을 겪으며 이룬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런 둥근 모습을 보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다듬고자 마음을 되새겼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물을 맞으면 저렇게 둥글게 될까? 그렇게 수많은 세월이 흘러 모난 돌이 둥글게 되니 햇살을 맞으면 반짝반짝 빛나는 돌이 되는구나!”


몽돌을 보며 이춘환은 자신의 삶의 지표로 삼는다. 그가 바라본 몽돌의 모습은 추사가 구멍을 낸 벼루나 다름없었다. 모든 결실은 오랜 세월 각고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춘환은 자신의 미술 세계에 진력이 느껴질 때가 되면 추사의 붓과 벼루, 구계등 해안의 몽돌을 생각하며 더욱 작품에 매진하였다. 그는 아직도 매일 작업을 쉬지 않는다. 하루하루 쉬지 않고 붓을 잡는 것이 그토록 존경하여 사숙하던 추사의 뜻에 따르는 길임을 이춘환 스스로 알기 때문이리라.